디즈니의 감성을 벗은 새로운 작품
‘주먹왕 랄프’는 2012년에 개봉한 디즈니의 무려 52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다. 내 게시글 목록을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상당히 좋아하고 즐겨보는 편이다. 주변 사람들이 유명한 영화 이름을 대면서 봤냐고 물어보면 보지 않은 영화가 꽤 많은데, 애니메이션 영화는 웬만한 건 거의 다 봤을 정도. 특히 디즈니 영화의 경우 워낙 유명한 동화들이 모티브인 작품들도 많아서 동화책으로 한 번, 디즈니 영화로 한 번 보는 것은 필수였다. 나는 디즈니 특유의 그 동화 같은 감성을 참 좋아하는데, 그 감성이 우리를 항상 추억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는 한다. 하지만 이번 ‘주먹왕 랄프’는 그동안의 디즈니 영화들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는데, 그동안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동화 같은 감성들이 많았다면 이번에는 주인공부터가 악역이다. 게다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디즈니공주’ 클리셰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공주가 등장하며, 일반적인 멋진 왕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디즈니의 모습을 거의 벗어던진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오락실에 있는 게임들 속 캐릭터들이 사는 게임세계가 배경으로 게임세계가 구현되어 있는 모습들이 정말 현대적이어서 디즈니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완전히 새로운 느낌의 배경이었다. 물론, 등장하는 게임들은 80~90년대의 클래식 게임들이 모티브이기는 하다. 예를 들면 팩맨, 소닉, 마리오와 같은 게임들 말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을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조금 친근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신선한 관점 : 악역이 주인공이라니!
이 영화의 주인공 ‘랄프’는 8비트 게임 ‘다 고쳐 팰릭스’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데, 무려 30년 동안 악역만 맡아왔고 같은 게임 세상에 사는 주민들조차도 자신을 싫어하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고 생각한다. 외로움과 절망을 느끼게 된 랄프는 악당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게임을 떠나 다른 게임 세상 속으로 넘어가고, 그러한 랄프의 행동 때문에 게임 세상 자체에 위기가 닥치게 되며 영화의 사건들이 전개된다. 우선 주인공이 대외적으로는 악역이라는 소재 자체도 당시에는 굉장히 신선했다. 우리에게 주인공은 완벽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며 보통 이렇게 게임을 소재로 한다면 보통 게임의 주인공의 관점에서 전개되고는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다 고쳐 팰릭스’의 팰릭스가 아닌, 악역인 랄프라는 것.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저 나쁘다고만 생각한 악당의 관점을 보여준다는 게 참 신선했다.
어린 시절, 게임 속 세상에 내가 들어갈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들어가서 주인공이 되어 저 악당을 물리치고 게임을 클리어하고 싶다는 생각. 보통 악당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감정을 비틀어 구현해 낸 것이 아닐까?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제, 우리뿐만이 아닌 그 주인공을 상대로 항상 악역을 해야 하는 그 악당조차도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랄프는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메달을 얻고자 다른 게임까지 넘나들며 노력한다. 자신의 게임 속이 아닌 다른 게임 세상에서 죽게 되면 다시는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서사는 보는 관객들에게 자연스레 랄프를 응원하는 기폭제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메달을 따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랄프의 모습을 보는 내내 주먹을 꽉 쥐고 응원했고, 메달을 딴 뒤에 다른 게임 세상에서 메달을 뺏겨 악착같이 메달에 집착하는 랄프의 모습까지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결국 랄프는 메달을 다시 되찾지만, 원래의 게임세계로 돌아가보니 이미 자신이 살던 게임은 고장판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제야 랄프는 메달은 아무 의미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메달을 밖으로 던져버리는데, 슈가러시 게임기가 보이면서 자신이 메달을 되찾기 위해 매정하게 굴었던 바넬로피 사진이 붙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슈가러시에서 바넬로피는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알려져 있었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는데 이에 수상함을 느낀 랄프는 슈가러시 세계로 향한다. 자신의 게임이 고장판명으로 없어지기 직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랄프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리고 랄프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걸 각오까지 해가면서 슈가러시 세계를 구해낸다. 얼마나 정의로운 악역인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랄프는 이야기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기 위해 메달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저 꼬마가 날 좋아하는데 내가 나쁜들 얼마나 나쁘겠어.”라고.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악역이 온전한 악역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디즈니 작품과 다르게 처음부터 사랑받는 캐릭터와 미움받는 캐릭터의 대비를 잘 보여주면서, 소수자와 약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되, 그 개성까지도 너무 잘 살려 낸 매력적인 작품, 주먹왕 랄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