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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 미야자키 하야오의 보다 나은 세상으로의 한 걸음

by 윤리드 2024.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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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

미야자키하야오 감독의 사상을 모두 담은 작품

오늘 소개할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인 ‘붉은 돼지’ 이후 5년 만에 낸 작품이었으며 한 때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일 것이라고 거론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지금까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작품들 중에서도 이 ‘모노노케 히메’는 그의 사상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는 작품이며, 영화 자체를 구상하는 데에만 16년이 걸렸고 제작기간도 3년, 예산도 만만치 않게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모든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내 기억 상으로는 이 영화가 내 인생의 첫 지브리 영화다. 몇 살 때쯤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당시 여자주인공인 원령공주를 보면서 굉장히 예쁘다는 생각만 했던 기억이 난다. 대충 많이 어릴 때였기에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른 지브리 영화를 보면서, 그림체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런데 그때도 좀 어렸던 탓에, 누군가 ‘원령공주’라고 이야기하자 그런 제목이 아니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노노케 히메와 원령공주가 똑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 정도가 이 영화에 대한 내 첫 기억들이다. 여전히 내용을 잘 알지는 못했다. 무려 ‘그’ 미야자키 하야오의 사상을 모두 담고 있다는데, 어린 나는 안타깝게도 그 사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 자체는 전체관람가이지만 내용은 어린아이들이 이해하기에 조금 벅찬 느낌도 있었다. 게다가 다른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비해 조금 잔인하면서 그로테스크했기에 더더욱 아이들이 보기에는 힘들만한 작품이었던 것 같다. 다만 그러한 장면들을 조금 넘어가면 귀여우면서 신비한 동물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좋아했을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일본에서는 확실하게 성인층을 타깃으로 하고 장엄하고 냉혹하며, 날카롭게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평가했으며 앞서 말한 어두운 분위기라던가 고어한 부분들이 너무 대놓고 나와서 거의 성인 애니메이션 수준이기는 하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전체관람가로 판정이 되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어찌 되었든 일단 나는 지금도 징그럽고 잔인한 장면을 잘 못 보기 때문에, 그러한 영화 내용을 떠나서 포스터에 원령공주가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히고 있는 것조차도 보기 힘들어했다.

그런데도 계속 이 영화가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그로테스크한 장면만 잘 넘어가면 캐릭터의 디자인이라던가, 풍경들, 움직임과 같은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이후에도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고등학생 때였나, 일본어 시간에 지브리 영화를 몇 번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 때 나는 바로 ‘모노노케 히메’를 떠올렸다. 학교에서 이 영화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그날 집에 돌아와 구석에 있던 영화 CD를 플레이했다. 이제 확실히 영화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나이가 되어 다시 보니,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장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그저 명백하게 정해진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착한 사람이고,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누구의 관점에서 내용을 풀어나가느냐에 따라서 주인공이 달라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눈이 트이니 등장인물들의 성격들도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지브리에서 이야기하던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동화적인 요소를 최대한 빼고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 때는 그저 그림이 아름다워서 본 장면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다시 보면서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저 그런 추억 속 영화로 끝날 작품이 절대 아닌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사상을 모두 담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것 같은 작품으로, 흥행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나은 세상으로의 한 걸음

앞서 이야기 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절대선과 절대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타타라마을의 지도자이자 수장인 ‘에보시’의 경우 주인공들의 입장에서는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해치는 존재로, 악인으로 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에보시에게 그런 행위들은 생존과 필수적인 번영을 위한 결과일 뿐이고, 특히 타타라마을 주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에보시는 떠도는 주민들이나 아이들, 가난한 사람은 물론 여자들까지 모두 포용하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술까지 가르치는 멋진 지도자이다. 주민들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재앙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는, 리더십까지 뛰어난 선인인 것이다.(물론 에보시는 이후에 극도한 공리주의적 성향으로 비판을 받지만, 이 또한 관점에 따라 완전한 악인으로 볼 수는 없다.)이처럼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지기에,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이 정말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쁜 사람이고 싫은 사람일까?’, ‘나는 누군가에게 나쁘고 싫은 사람이지는 않을까?’ 등등, 평소 나의 행동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그저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보였던 동물들도, 처음에는 피해자였을지언정 그 증오로 인해 마을을 파괴함으로써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힌 인간들과 별개인 인간들까지 피해를 입혔다. 즉, 완전한 피해자와 완전한 가해자는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분노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나가면, 행복한 결말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을 것이고, 그 싸움에는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아시타카는 자연과 인간의 싸움을 계속해서 막으려 노력하고, 그 노력으로 인해 자연과 인간은 서로 각자의 실책을 인정하게 된다. 즉, 이 영화는 극적인 해결이나 행복한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현실적인 화법으로 보다 나은 세상으로의 한 걸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 순간에 좋아지는 것이 아닌, 작은 노력과 변화가 쌓여 점차적으로 나아지는 것. 이것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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